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35](韓國戰爭, 문화어: 조선 전쟁[36],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戰/朝鮮戰爭, 중국어 간체: 韩战/朝鲜战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유엔군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37]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북한의 김일성은[38]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삼팔선 이남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에 도달했고 6월 28일에 서울을 함락했다. 북한군의 무력 공격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82호와 제83호를 의결하였다. 1950년 6월 27일에 의결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83호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해당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유엔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의결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84호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제공하는 군대와 기타 지원을 미국의 지휘 아래 통합된 지휘를 받게 할 것을 권고하였다.[39]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40]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41]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며 내만주에 핵폭탄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하지못했다.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포로 송환 등 여러가지 갈등이 많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 대결을 벌임으로써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 즉, 6.25 전쟁을 미국과 소련의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그리고 남북 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는데 즉,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쉽게 말하면 옛날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을 때에 백제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38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38선 북쪽으로선 개마고원을 경계로 평양, 개성, 남포, 신의주, 해주을 포함한 서부 지역은 중화민국이 동부 지역 원산, 금강산, 함흥, 흥남, 장진, 혜산진, 청진, 나진을 포함한 곳은 소련이 점령해서 5년 간 신탁 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10월 1일에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38선 북쪽의 서부지역이 공산당으로 넘어가 서부 지역도 공산국가가 되므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떼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50] 김일성은 48번 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무기 지원과 남침을 허락했으며 허락을 받고 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남침 허락과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51]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력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38선이남에는 미군이 있었으며 핵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기지원을 거절하였으며 소련은 핵무기가 아직 없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하고 있었다.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2] 이러한 이유로 6.25 전쟁 당시 소련은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했지만 소련군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하였다. 1.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242대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전쟁이 일어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의도방치했다) 2.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대화와 협상으로 전쟁을 막을수 있었으나, 이승만은 실효성없는 의회민주주의방식의 입싸움으로서 강경하게 대응했고 반대로 실제무력대결상에서의 주요문제들인 군사력강화와 전면대비태세를 갖추는 정책을 포기하는 모순과 부정부패, 無能을 보인다 이는 의도된 정책으로 판단되었다.-전쟁발발을 유도했다) 3.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는 오판을 저질렀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82]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1.미군주둔시 북한이 도발할수 없었다 2.미군철수시 북한이 도발할 것이 명백하다 3. 북한도발시 한국군으로서는 방어할수 없다(방어할수 없게 만들고 전쟁이 발발하도록 유도한다) 4. 북한도발시 한국이 패배할것이다. 5. 자유인권민주수호를 위한 정의의 국제군조직후 미군대규모육상부대투입할수 있다. 6. 태평양을 가로질러 전면전에 대응하는 대규모육군8개사단(3개군단급)을 운송한다.(항공모함 및 구축함, 기함등이 요구되고 공군력증대가 요구된다,태평양전쟁에 버금가는 군사장비요구. 군산복합체 6. 아틀란티스아종계,고구려곰족계,비주류적하위파충류계열들이 주류인 한반도와 여진족주류인 만주를 중심으로 태평양전쟁급의 전쟁으로 확전하고 장기화할수 있다.-맥아더원본전략체계도참조 군산복합)-군산복합은, 베트남전쟁시, 중국남부로 전선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가지다. 중국남부로서의 전선확대는 모택동(이명로)이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그로서 태평양전쟁, 제2차세계대전급의 戰費를 획득하고 군산복합의 경영이익을 극대화할수 있다로서 판단된 것으로 목격관찰되다. 4.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85]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북진통일론 : 이승만은 군산복합체-아이젠하워라인-의 주요멤버였다. 프란체스카는 군산복합패밀리주요멤버였다. 국가지도자로서 한국군의 전투력,무기체계등 전반적인 군사력이 북한군대비 전면열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미군철수를 막지 않았으며, 북한군이 도발할것을 알면서도 국방태세를 강화하지 않았다.)-이승만은 실제무력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말하고 강경대응하여 결국 전쟁을 발발시킨다. 5.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미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 무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군산복합은 의도묵살무시하다.군사정보및전략보고서에명기된명백한전쟁발발위기를의도적으로전면부인) 6.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전쟁준비를 마치고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을 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한국군 공식무장해제-신성모는 북한군장성으로서 이중간첩, 국군무장해제를 시키고 월북, 전쟁발발) 7.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는 남침정보를 매번 무시하였고 채병덕에게 명령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체하였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외출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날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 특히 신성모는 북한군장성급이며, 북한군이 도발할것이 명백함을 알면서도, 병사들을 휴가를 보내고 방만하게 만들었다. 국군병력 절반이상이 휴가를 간후 북한군이 전면도발한다.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발시킨 것이 명백하다) 6.25전쟁, 한국전쟁은, 아이젠하워(조선국원균,아플레이아데스2대수장,말데크곤충룡박원규이자 박헌영, 이 당시 김일성은 MALDEK악룡이복순으로 목격관찰되다.)놈의 군산복합체에 의하여 의도자행된 전쟁으로 판단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목적은, 아틀란티스군세를 파괴시키는 것이었으며, 유제국관련 원고조선,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세종대왕과의 연결고리로서 존재하던 대한민국 국체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목적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 국체는 유제국관련 아틀란티스에 있으며, 고구려계열(예맥족,곰족라인)과 연결된다. 대한민국 상위계층의 98%가 선비족(식인파충류계열, 영국,미국,독일계와 동일계열)이나, 하위계층은 대부분 아틀란티스아종계(600만명),고구려곰족계아종계(200만명),여진족계통(220만명)으로서, 미국놈 영국놈 독일놈들이 보건대는, 향후 유제국아틀란티스계통을 노예화하고, 선업공덕으로부터 발원되는 재물,돈,기술,과학등을 독점하기 위한 전략에 방해가 되는 종족류에 속할것이다. 이는 크메르인 대거학살사태,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내전, 유고연방해체, 유고슬라비아전쟁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승만은, 선비족상급수장(예종)이었으며, 미국놈 계통과 일계였으며, 프란체스카(군산복합체 패밀리)와의 결혼으로 군산복합체의 주요일원이 된 자로서 목격관찰되었다. 이승만이가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판단처리되었다. 국가지도자로서, 김일성,박헌영등 북한인사들과 협상을 통해서 전쟁을 막아야 했으나 강경하게 대응하고 전면충돌을 유인했으며, 북한군사력대비 방어격퇴를 위한 적절한 한국군방어태세와 전략체계를 전면무시하고 묵살하는 모순된 정책을 수행하였다. 신성모등 북한군장성 이중간첩의 행위를 허용하고 막지 않았다. 박헌영은 말데크곤충룡박원규의 아종이다. 김일성은 말데크악룡이복순의 아종이다. 이승만이가 국가지도자로서 적절하게 대응했다면 전쟁을 막았을 것이며 설혹 전쟁이 터져도 방어격퇴할수도 있었다고 목격관찰되었다 이는 아틀란티군세에 대한 파괴전략의 일환이며 유제국관할권탈취를 위한 군산복합체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판단되었다. 이후 영미주도하의 영연방체계가 독점독식하는 영미주도의선진국연방체계로 영구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35](韓國戰爭, 문화어: 조선 전쟁[36],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戰/朝鮮戰爭, 중국어 간체: 韩战/朝鲜战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유엔군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37]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북한의 김일성은[38]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삼팔선 이남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에 도달했고 6월 28일에 서울을 함락했다. 북한군의 무력 공격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82호와 제83호를 의결하였다. 1950년 6월 27일에 의결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83호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해당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유엔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의결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84호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제공하는 군대와 기타 지원을 미국의 지휘 아래 통합된 지휘를 받게 할 것을 권고하였다.[39]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40]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41]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며 내만주에 핵폭탄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하지못했다.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포로 송환 등 여러가지 갈등이 많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 대결을 벌임으로써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 즉, 6.25 전쟁을 미국과 소련의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그리고 남북 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는데 즉,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쉽게 말하면 옛날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을 때에 백제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38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38선 북쪽으로선 개마고원을 경계로 평양, 개성, 남포, 신의주, 해주을 포함한 서부 지역은 중화민국이 동부 지역 원산, 금강산, 함흥, 흥남, 장진, 혜산진, 청진, 나진을 포함한 곳은 소련이 점령해서 5년 간 신탁 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10월 1일에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38선 북쪽의 서부지역이 공산당으로 넘어가 서부 지역도 공산국가가 되므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떼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50] 김일성은 48번 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무기 지원과 남침을 허락했으며 허락을 받고 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남침 허락과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51]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력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38선이남에는 미군이 있었으며 핵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기지원을 거절하였으며 소련은 핵무기가 아직 없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계속해서 스탈린을 설득하고 있었다.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52] 이러한 이유로 6.25 전쟁 당시 소련은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했지만 소련군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하였다.

1.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242대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전쟁이 일어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의도방치했다)

2.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대화와 협상으로 전쟁을 막을수 있었으나, 이승만은 실효성없는 의회민주주의방식의 입싸움으로서 강경하게 대응했고 반대로 실제무력대결상에서의 주요문제들인 군사력강화와 전면대비태세를 갖추는 정책을 포기하는 모순과 부정부패, 無能을 보인다 이는 의도된 정책으로 판단되었다.-전쟁발발을 유도했다)

3.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는 오판을 저질렀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82]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1.미군주둔시 북한이 도발할수 없었다 2.미군철수시 북한이 도발할 것이 명백하다 3. 북한도발시 한국군으로서는 방어할수 없다(방어할수 없게 만들고 전쟁이 발발하도록 유도한다) 4. 북한도발시 한국이 패배할것이다. 5. 자유인권민주수호를 위한 정의의 국제군조직후 미군대규모육상부대투입할수 있다. 6. 태평양을 가로질러 전면전에 대응하는 대규모육군8개사단(3개군단급)을 운송한다.(항공모함 및 구축함, 기함등이 요구되고 공군력증대가 요구된다,태평양전쟁에 버금가는 군사장비요구. 군산복합체 6. 아틀란티스아종계,고구려곰족계,비주류적하위파충류계열들이 주류인 한반도와 여진족주류인 만주를 중심으로 태평양전쟁급의 전쟁으로 확전하고 장기화할수 있다.-맥아더원본전략체계도참조 군산복합)-군산복합은, 베트남전쟁시, 중국남부로 전선을 확대한다는 계획을 가지다. 중국남부로서의 전선확대는 모택동(이명로)이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그로서 태평양전쟁, 제2차세계대전급의 戰費를 획득하고 군산복합의 경영이익을 극대화할수 있다로서 판단된 것으로 목격관찰되다.

4.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85]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북진통일론 : 이승만은 군산복합체-아이젠하워라인-의 주요멤버였다. 프란체스카는 군산복합패밀리주요멤버였다. 국가지도자로서 한국군의 전투력,무기체계등 전반적인 군사력이 북한군대비 전면열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미군철수를 막지 않았으며, 북한군이 도발할것을 알면서도 국방태세를 강화하지 않았다.)-이승만은 실제무력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말하고 강경대응하여 결국 전쟁을 발발시킨다.

5.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미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 무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군산복합은 의도묵살무시하다.군사정보및전략보고서에명기된명백한전쟁발발위기를의도적으로전면부인)

6.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전쟁준비를 마치고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을 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한국군 공식무장해제-신성모는 북한군장성으로서 이중간첩, 국군무장해제를 시키고 월북, 전쟁발발)

7.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는 남침정보를 매번 무시하였고 채병덕에게 명령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체하였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외출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날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 특히 신성모는 북한군장성급이며, 북한군이 도발할것이 명백함을 알면서도, 병사들을 휴가를 보내고 방만하게 만들었다. 국군병력 절반이상이 휴가를 간후 북한군이 전면도발한다.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발시킨 것이 명백하다)

6.25전쟁, 한국전쟁은, 아이젠하워(조선국원균,아플레이아데스2대수장,말데크곤충룡박원규이자 박헌영, 이 당시 김일성은 MALDEK악룡이복순으로 목격관찰되다.)놈의 군산복합체에 의하여 의도자행된 전쟁으로 판단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목적은, 아틀란티스군세를 파괴시키는 것이었으며, 유제국관련 원고조선,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세종대왕과의 연결고리로서 존재하던 대한민국 국체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목적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 국체는 유제국관련 아틀란티스에 있으며, 고구려계열(예맥족,곰족라인)과 연결된다. 대한민국 상위계층의 98%가 선비족(식인파충류계열, 영국,미국,독일계와 동일계열)이나, 하위계층은 대부분 아틀란티스아종계(600만명),고구려곰족계아종계(200만명),여진족계통(220만명)으로서, 미국놈 영국놈 독일놈들이 보건대는, 향후 유제국아틀란티스계통을 노예화하고, 선업공덕으로부터 발원되는 재물,돈,기술,과학등을 독점하기 위한 전략에 방해가 되는 종족류에 속할것이다. 이는 크메르인 대거학살사태,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내전, 유고연방해체, 유고슬라비아전쟁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승만은, 선비족상급수장(예종)이었으며, 미국놈 계통과 일계였으며, 프란체스카(군산복합체 패밀리)와의 결혼으로 군산복합체의 주요일원이 된 자로서 목격관찰되었다. 이승만이가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판단처리되었다. 국가지도자로서, 김일성,박헌영등 북한인사들과 협상을 통해서 전쟁을 막아야 했으나 강경하게 대응하고 전면충돌을 유인했으며, 북한군사력대비 방어격퇴를 위한 적절한 한국군방어태세와 전략체계를 전면무시하고 묵살하는 모순된 정책을 수행하였다. 신성모등 북한군장성 이중간첩의 행위를 허용하고 막지 않았다. 박헌영은 말데크곤충룡박원규의 아종이다. 김일성은 말데크악룡이복순의 아종이다. 이승만이가 국가지도자로서 적절하게 대응했다면 전쟁을 막았을 것이며 설혹 전쟁이 터져도 방어격퇴할수도 있었다고 목격관찰되었다 이는 아틀란티군세에 대한 파괴전략의 일환이며 유제국관할권탈취를 위한 군산복합체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판단되었다. 이후 영미주도하의 영연방체계가 독점독식하는 영미주도의선진국연방체계로 영구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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